본문 바로가기
주제 없음이 주제/생각 무료전시

아버지와 아름다운 동행

by 문먐미 ⋆⁺₊⋆ ♡̷̷̷ 2022. 9. 21.
728x90

 

8월 3주차로 접어드니

아버지의 기력이 완전히 바닥나버렸다.

 

 

8월 2주차 때 만해도 혼자서 거동도 가능하고

펜타닐 패치가 잘 듣고 장루에 양은 적지만 변은 나오고 있어서 괜찮으시겠거니..

이번 달은 이렇게 넘기실 수 있으시겠다 했지만 점점 힘들어하셨다.

오심 구토도 엄청 잦아졌고 아예 드시질 못했다.

 

그래도 수시로 나에게 그러셨다.

 

“수박 먹자!”

 

내가 수박을 긁어먹으면 아빠는 긁어서 나온 국물을 마셨다. 설탕 조금 들어간 물인 수박물이 유일하게 아버지가 드실 수 있는 유일한 ‘영양분’이었다.

 

 


 

 

8월 16일, 고모와 사촌오빠, 작은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원래 호스피스 입원을 권유하려고 찾아온 것이나

아버지가 말고 못꺼내게 잽싸게 선수치시는 바람에 설득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하고싶은대로 하라고 마무리를 짓고 가셨다.

 

 

오죽 호스피스 얘기가 싫으셨으면

 

“호스트 인지 뭔지 나는 절대 안간다”

 

“아빠, 호스피스!”

 

고모가 전화를 호스피스 병동 얘기를 꺼내려 전화를 걸어오시면 휴대폰 화면에 고모 성함을 보시곤 2주간 수박물만 마시며 버텨내신 기력없는 몸으로 잽싸게 통화 종료 버튼을 연타로 누르셨다.

 


 

 

8월 17일 고모께서 왔다 가셔서 그런지 급격하게 컨디션 저하를 보이셨다.

나보고 이번 주가 고비일 것 같으니

본인이 일찍 죽으면 여행도 다니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으니 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워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눈물은 아버지가 보지 못하시게 몰래 몰래 흘렸다.

 

 

그래서 17일 부터 원래 엄마집에서 아빠집으로 오가던 것을 아빠집에서 자고 엄마집에서 저녁먹고 다시 아빠집에서 가서 자기 시작했다.

 

 

1-2주차 때는 사실 간단한 집안일 정도와 아버지의 심부름 정도였지만 3주차 때부터 오심 구토 때문에 아빠가 전반적인 쇠약과 진통으로 괴로워하셨고 왜 병원이 아닌 집을 고집하시는지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였다.

 

 

아빠는 6월 초 구안와사가 온 상태였어서

(한창 영국에서 결혼식 준비 중이었던 나에게는 영통하면 본인이 사랑니를 뽑고 붓기가 빠지면서 이렇게 되셨다고 거짓말을 하셨다..)

오른쪽 눈이 전혀 감기지 않았다.

볼 때마다 참 안쓰럽고 불편해보이고 심지어 길병원에 계실 때 아버지의 눈건강 케어를 전혀 하지 않아서 각막이 울퉁불퉁해졌다.

 

 

아버지가 불편감을 호소하셔 눈물액과 점안겔을 구매해 일주일 해보니 뚜렷하게 호전이 보였다.

하지만 전반적인 상태는 빠르게 악화됐다.

 

 


 

 

8월 첫재주 - 둘째주 까지는 악화가 더뎠다.

8월 17일부터 21일까지 급속도로 컨디션이 안좋아졌다.

 

 

주말에는 여자친구분이 오셔서 아빠 집에서 주무셨는데 21일 아빠가 여자친구분도 나도 자고가지 말라고 혼자 자보겠다 하셨다.

 

 

누가봐도 심각하게 컨디션이 나빴지만

아빠말을 믿고 22일 월요일 오전 10시에 아버지 집에 도착했더니

내가 9월 17일 영국에 가기 전에 본인이 죽어야한다며 손목을 그어버리는 시도를 하셨다.

 

 

아버지는 맨날 하시던 말씀이

 

“아… 빨리 죽어야하는데

왜 이렇게 빨리 안죽어.. 씨…”

 

아버지 입에서 그런 말을 들어야하는 나의 억장은 오죽했을까.. 나는 그저

 

“사람이 죽는 시기는 정할 수 있고 마음대로 못하는거잖아~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

 

라며 넘기곤 했다.

내가 영국으로 가기 전, 추석이 다가오기 전에 본인 생을 스스로 마감하고 싶으셨으리라…

 

 

결론적으로 결국 자살 시도를 하셨고 기운이 없으셔서 혈관을 긋지도 못한 채 표피층이 벗겨진채로 이미 상처는 지혈이 되어있었다.

맨 처음 발견했을 때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어안이 벙벙했다. 방안과 화장실에 흩어진 피하며.. 맨 처음에는 피토인 줄 알았다. 워낙에 구토를 하려고 하시니… 그런데 방안으로 들어가 널부러진 아버지의 왼쪽 손목의 상처가 나를 무척 화나게 했다.

심지어 이 사단이 났는데도 응급차도 부르지 말라고 하셨다.

상처를 먼저 처치를 해야할 것 같아서 약국에 가보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수면제를 자꾸 사달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이상한 생각하실까봐 당연히 수면제는 안되겠지만 수면유도제를 구매하고 상처를 응급처치할 것을 사와 상처 주변과 피를 닦고 응급처치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께 계속 병원에 가자고 설득했다.

 

“내 몸은 내가 알아.. 이틀만 더 기다려봐.”

 

“그럼 이틀 뒤에도 아빠 계속 살아계시면 내가 억지로 응급차 불러서 아빠 데리고 갈거야”

 

그러라고 하셨다.

고모, 삼촌이랑 통화도 하고 정리할 것을 정리하니 30분 지나서 아버지가 내일 응급차를 부르라고 하셨다 그러다가 20분 지났을까 지금 불러서 가자고 하셨다.

 

 

오후 1시반이 넘어서 응급차를 타고 응급센터에 도착했지만 차 안에서 1시간 반 정도 대기를 하고 나서야 응급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암환자들은 대체적으로 짜증이 늘어난다.

엄청 아프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이다. 응급실 안에서도 짜증을 내는 아빠와 아침에 겪었던 모든 것들이 휘몰아쳐서 나도 결국 처음으로 짜증을 내고야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 생의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다. 아버지는 너가 고생이 많다며 그렇게 애둘러서 말하셨다.

 

 

아버지가 삼촌을 찾으셔서 중간에 보호자를 잠시 교체를 하고 삼촌과 대화를 할 수 있게 해드렸고 중간에 삼촌이 애는 저녁을 먹여야겠다고 함께 나갔다 오기도 했다.

 

 

응급실에서 시행한 피검사 결과 아빠는 고칼륨혈증으로 당장 심장 마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신장기능이 망가져버렸고 처음에는 신장내과와 협진을 해서 그쪽으로 입원하는 듯 했으나 다시 아버지가 그렇게 싫어하셨던 종양내과 병동으로 입원하게 됐다.

 

 

아버지가 보호자 상주 신청하라고 하셨는데

아버지의 상태가 워낙 위중한 상태라 병동에서 보호자 상주를 신청해서 나도 코로나 검사를 하고 함께 병실로 입실하였다.

 

 

보호자 간병은 24시간 병원에서 생활하야하고 코로나로 인해 상주 보호자는 병원 밖을 나가지도 못한다고 그랬다.

처음에는 24시간 병원에서 어떻게 지내냐고 바보처럼 아빠에게 찡찡거렸다. 이렇게 말한걸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이 날 나는 계속 심통이 나있던 것일까. 이 날 만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내가 병신같아서 눈물만 난다.

 

 

당직의가 나를 조용히 불러 나를 나무랐다. 아버지 상태가 너무 위태롭다고 정말 위험한 상태라면서 투석을 해야만 가망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평소 아버지가 집에서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았고 아버지의 임종을 내가 영국으로 가기 전에 내가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심폐소생술 및 적극적 치료를 비동의한다고 말했고 의사도 아버지가 의식이 있으실 때 결정하자고 하여 그 날 함께 아버지와 서명을 하였다.

심폐소생술 및 적극적 치료는 비동의 하지만 아버지가 고통이 없으셨으면 좋겠어서 평소에 호스피스 입원을 권유했는데 아버지가 거절하셨다가 이렇게 입원하게 된 것이라고 그러니 아버지의 통증만이라도 조절 잘 해달라고..

 

 

병실에 입실 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아버지가 변을 보시고 싶다 하셨다.

장루를 하고 계신 상태셔서 항문으로는 변을 못보시는 줄 알았는데 집에서도 여태까지 혈변을 보셨다고 하는 것이다!

황당했다. 왜 여태까지 나한테 말을 안하셨냐고. 아버지는 장루 수술을 했기 때문에 고여있는 썩은 피들이 나오는 거라고 별거 아니라고 하셨다.

 

 

기저귀가 있으니 그걸로 보라고 병동 간호사와 도우미께서 그러셨는데 아버지는 거동도 못하시면서 본인이 직접 화장실에 가서 누시겠다고 해서 병동 간호사와 아버지가 간이 화장실을 아버지 침상 옆에 들고와서 보는 걸로 합의를 했다.

 

 

“냄새 심하지?”

 

“아니, 이 정도면 내 똥냄새가 훨씬 더 지독해~”

 

“고마워..”

 

쑥스러우면서도 나지막이 대답하셨다.

지금 이 상황이 딸 앞에서 아버지는 민망하시리라. 덜 민망하시길 원했어서 아버지 뒤를 닦아드리면서 농담도 건넸다.

 

“아빠는 나 애기 때 기저귀 갈아본 적 있어?”

 

“없어.”

 

“와~ 아빠는 내 기저귀 간 적도 없는데

아빠 딸은 아버지 변도 닦아드리네~”

 

 

이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새벽 내내 간호사들이 들락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잘 수 없던 또 다른 이유는 같은 병실에는 보호자 상주해있는 또 다른 중증환자가 있었다. 폐암 + 폐렴으로 고롱고롱 거리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24시간 들려오는 환자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까 첫 날에는 짜증이 절로 나더라..

그걸 본 아버지는 다음 날에 상황봐서 나보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그러셨다..

 

“음.. 상황 봐서~”

 

 


 

 

아침이 되자 환자 일반식이 도착했다.

아버지에게 물에 밥 말아서 물만 드렸다.

 

“밥 먹어..”

 

늘 끼니 때 되면 내 밥을 먼저 챙겨주시는 아버지.

 

 

고모와 작은 아빠께 연락이 오면 늘 스피커 폰으로 대화를 시켜드렸고 역시 여자친구분과도 영통을 시켜드렸다.

얘기하는 도중에 대뜸 아버지가 그러셨다.

 

“사랑해!”

 

 

점심이 되기 전에는 아버지의 왼쪽 손목 상처를 봉합해줄 응급실 의사가 왔다. 수술실에서 수술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더니 결국 병동에서 하게 됐다. 아버지는 국소 마취하고 봉합 시술 받는게 무서우셨는지 내 손을 먼저 꾹 잡으셨다..

 

 

 

 

 

 

 

사실 국소마취제 맞을 때가 제일 아프고 그 뒤로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계신 아버지는 봉합을 하는 동안 곤히 잠이 들어버리셨다.

 

 

이 이후로는 아버지께서 거의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채 모르핀에 의지하여 잠만 주무셨다.

 

 

이 때 부터 너무 불안했다. 입원 당시 아버지에게 짜증을 냈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혹시 이대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그 것이 마지막 기억으로 남게 되지는 않을지.. 너무 죄송스럽고 두려웠다.

후회할 것 그 당시에도 알면서도 왜 나는 내 끓어오르는 바보같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아파서 고통받는 아버지께 내비쳤던 것일까.

 

 

아버지께서 중간에 깨더니 나한테 말을 거셨다.

 

 

“죽기 참 좋다..”

 

“응? 뭐라구?”

 

“죽기 좋다구..”

 

 

마약성 진통제가 들어가니 집에서 오롯이 견디셔야했던 통증이 사라지신 것 같았다.

 

 

중간에 정신과 의사도 협진 차원에서 다녀갔다.

이유는 아빠가 자살 시도를 했기 때문에 평소에도 병력이 있었는가에 대해 물으셨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는 아버지가 퇴원을 하시면 그 때 정신과 약을 드셔야하고 입원 동안에는 안드셔도 될 것 같다 하셨다.

 

 

이 날 자문형 호스피스 간호사 선생님께서 방문하셨다. 호스피스 입원 대기를 걸어둔 상태였고 입원을 할 수 없기에 자문형 선생님이 오셔서 이런 저런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다.

선생님은 우리 가족의 히스토리 위주로 들어주셨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현재 아버지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나는 영국으로 다시 출국 전에 아버지 임종을 지켜보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이에 대해 아무래도 임종은 지켜보실 것 같다라고 나를 안심시켜주셨다.

 

오히려 암병동 간호사들과 레지던트는 보호자에게 아버지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아서 불만이었는데 알아서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시니 참으로 고마웠다.

 

 

 

 

 

입원한 지 이틀째 되는 날 밤, 아빠가 코를 골며 주무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제 아프지 않으시니 푹 주무시는구나…

진작에 억지로라도 데리고 왔어야했나 싶었다.

 

 


 

 

입원 3일 째, 8월 24일 수요일

아버지는 주로 잠에 취해계셨다. 가만히 있어도 졸려오니 잠깐 흔들어 깨워도 금새 눈을 감으셨다.

 

앞서 말했듯 너무 불안해져왔다. 입원 첫 날에 아빠에게 짜증을 부렸던 그 순간 때문에 아빠한테 너무 미안했고 계속 눈물이 났다.

혹시라도 아빠가 이대로 임종을 맞이하시기 되면 어떡하지?

아빠가 내 앞에서 주무시고 계신데도 아빠가 보고 싶어서 엄청 울었다. 끼니가 되면 내 밥을 챙겨주시는 아빠는 더이상 온데간데 없고 마약성 진통제에 취해 계셨다.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보통 말기암 환자들은 마약성 진통제가 들어가면 입이 마른다. 그리고 혀에 궤양이 생길 수 있다.

아빠는 늘 입벌리고 입으로 숨을 쉬셔서 수시로 물 두세방울씩 떨어뜨려줬다. 그리고 구강위생에 신경을 쓰기 시작해서 치아와 혀를 닦여드렸다.

 

 

장루백에는 피만 나올 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워낙 깔끔하신 아버지라원하실 것 같아서 장루백도 교체해드렸다. 교체해 드리니 같은 병실 할아버지 보호자 분과 청소 여사님께서 이런 딸이 또 없다고 칭찬을 입마르게 하셨다.

민망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 좀 더 살갑게 할 걸… 입원할 때 아빠는 환자인데 화내지말고 아빠가 안힘들게 최선을 다해 치료진들에게 부탁드릴걸…

 

 

그런 미안한 마음에 더 열심히 간호하는 와중에 자문형 호스피스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보호자님 식사는 잘 하고 계신가요?”

 

“아.. 네 뭐…”

 

순간 울컥했다.

같은 병실에 있는 보호자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라면, 컵밥과 햇반+3분 카레 같은 편의점 음식들로 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호자님 혹시 초밥 좋아하세요? 보호자분들께서 식사하실 곳이 마땅치 않으니 제가 초밥 시켜서 찾아 뵙겠습니다.”

 

 

 

 

 

 

 

 

“보호자님 씩씩하게 잘 지내고 계시네요. 아버님 이름으로 주문해서 아버님이 사주시는 음식이다 생각하고 드셔주세요.”

 

자문형 간호사 선생님의 이 말을 듣자마자 울음이 터져버렸다. 선생님 품 안에서 꺼이꺼이 엉엉 울었다. 내 끼니를 챙겨주던 아빠였는데… 이제는 아빠를 흔들어 깨워도 10초가 안되어 눈을 감으신다.

 

선생님께서 아버지를 깨우셨다.

 

“아버님 따님께 할 말 없으세요?”

 

“고마워..”

 

“아버님 다른 말 있잖아요~ 시옷으로 시작하는”

 

“미음.. 미음..”

 

그리곤 다시 잠에 드셨다.

아마 미안하다고 하시고 싶어셨던 것 같다.

 

 

같은 병실에 보호자가 함께 상주해있는 폐암 환자 할아버지는 1인실로 옮기셨다. 그래서 이 날 밤은 간만에 푸욱 잔 것 같다. 물론 아버지도 푸욱 주무셨다.

 

 


 

 

8월 25일 목요일.

아버지는 오전 내내 여전히 주무셨다.

이제 온전히 스스로 움직이질 못하시니 밖으로 나가 욕창 매트를 사와 깔아드렸다.

 

 

 

 

 

아버지 침상에 이것저것 늘어나기 시작했다.

병원 베게 2개부터 남는 침대 시트, 남는 바지들.

아버지가 몸에 살도 없으셔서 난간 이런 딱딱한 곳에 몸이 베길까봐 베기지않게 해드렸다.

 

 

 

 

 

 

 

입원할 때는 이틀 뒤에 상황보고 집으로 가겠다고 그랬던 것치고는 살림살이가 어마어마하기 늘어났다.

젖은 가재 수건으로 닦여드리고 구강 관리도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해드렸다. 수시로 입안이 마르지 않게 물 두세방울씩 떨어뜨리고 입술에는 내가 바르는 립밤을 두텁게 발라드렸다.

 

 

 

 

 

 

저녁 식사 이 후 아버지께서 토를 하셨다.

색이 매우 진한 갈색 구토였다.

급해서 얼른 손수건으로 받아냈다.

이 때 만해도 몰랐다.

장루는 수요일에 교체해드린 이후로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아서 깨끗했고 암덩어리가 장기들을 눌러 단순히 소화가 안되고 위에서 고인 것들이 피와 함께 역류한 것인줄 알았다.

레지던트와 간호사에게 보여주고 말했는데

별 시덥지않게 반응하는 모습이 충격이었다.

아무리 환자와 보호자가 연명을 원치 않았다고 해도 암환자가 아프지 않고 불편하지 않게 해야하지 않나?

 

나는 왜 수술실 정신과에서만 근무해서 간호사이면서도 아빠에게 도움이 되질 못하는걸까..

내가 뭘 알아야 따질 것을 따질텐데 자책하며 기분이 나빠서 병실로 돌아와 아버지의 구강을 닦아드렸다. 길병원 종양내과 레지던트가 오더니 왈,

 

“지금 아버님 상태에서 뭘 더 해드릴게 없어요.”

 

나도 아버지가 임종기에 접어드셨다는걸 알고 있지만 보호자에기 아무 설명 없이 다짜고짜 저런식으로 말하는게 과연 의료진이 보호자에게 보여줄 태도인가 싶었다.

 

 

이 날 밤에는 간헐적으로 피토를 하셨고 할 때마다 이를 열심히 닦여드리고 이 날부터 나홀로 아버지를 금식 시켜야겠다고 맘 먹고 금식을 했다.

오심 구토 증상이 있으니 담당 간호사한테 항구토제도 맞혀달라고 요청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길병원에서는 아빠를 금식을 해야한다는 둥 어떻게 해야한다는 둥 이런 조치가 일절 없었다.

아빠가 왜 집에 계신 것을 고집하셨으며

이 병동에 다시는 오기 싫다고 하셨는지 이해가 갔다. 오더라도 보호자 상주를 요청해달라고 한 이유도…

길병원 호스피스 자문형 간호사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의료진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다.

 

 

이 날 오후가 되자 아버지는 섬망 증세도 처음으로 보이셨다. 자꾸 헛것이 보여서 허공에 손짓을 하고 고향 금평으로 가야한다며 커텐을 쥐어뜯고 내 팔을 붙잡고 자꾸 일어나려고 하며 본인을 일으켜 세워달라고 그러셨다.

 

 

“아이고 큰일났네… 좌측으로만 돌면 청천 금평 (고향) 인데… 내리자… 내리자…

야 좀 도와줘봐봐…”

 

“아빠 우리 지금 어딘데 내리자고 그래?”

 

“삼화고속. 얼른 내려야해”

 

“아빠~ 오늘은 여기서 잠깐 자고 내일 내가 금평 데려다 줄게~ 이제 눈 감고 자자. 딸이 옆에 계속 있을거니까 맘편히 눈감고 자. 내일 내가 데려다 줄게…”

 

적당히 아빠 증상에 맞춰드리고 안정을 시켜드렸지만 섬망 증세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간헐적 구토, 취침, 섬망 이 세가지 증상이 지속적으로 골고루 나타났고 밤 11시가 되자 아빠가 갑자기 혼자서 벌떡 일어나 앉으셨다.

 

“아이고.. 야단났네.. 종이랑 펜 좀 가져와봐.”

 

간호사실에서 A4 용지를 하나 빌리고 내 펜을 드렸다.

 

“아이고 큰일났네..”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무언가를 고민하시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목소리도 원래 아버지의 힘있는 목소리였다. 내가 8월 3일에 한국에 와서 아버지 병간호를 해드린 이 후로 아버지의 목소리는 기운없는 할아버지처럼 힘없는 목소리셨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본인의 원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나는 이런 아빠를 보며 앞으로 아빠가 이렇게 혼자 힘으로 일어나서 앉을 수 있는게 마지막 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아빠와 셀카도 찍었다.

 

 

“아이고 야단났네 이거..”

 

“아빠 조용히 말해야해..!”

 

내가 속삭이듯 말하니까 아버지도 속삭이듯 말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뭔가를 계속 쓰려고 하시는데 뭔가 힘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한글을 어떻게 쓰는지 기억이 잘 안나시는 것 같았다.

 

“아빠, 아빠 이름 써 봐. 신. 성. 보.”

 

“아빠, 오늘은 8월 25일 목요일이야”

 

날짜는 아빠가 무의식일 때도 늘 말해드렸고 섬망 증세가 보일 때도 날짜를 말해드렸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아빠는 내가 하는 말에 따라서 열심히 쓰려고 노력하셨다.

 

 

 

 

한시간 정도 이렇게 함께 글씨 쓰기 하면서 아버지는 다시 기운이 없어지시고 졸려하셨다. 눕혀드려고 침대를 봤는데 아빠 수액 라인이 빠져서 피가 흐르고 있는걸 발견했다. 급히 간호사를 불러서 수습하고 아버지를 뉘여드리고 침대 시트와 옷을 교체해드렸고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26일 금요일.

한 번 섬망 증세가 나타나니 금요일 오전 오후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쩔땐 낙지도 얘기도 하시고.. 주로 어딘가에서 내려서 고향으로 가야한다는 섬망 증세를 보이셨다.

 

그래도 다른 환자들에 비해 엄청 심한 수준은 아니라 낙상 위험만 지켜만 보면 된다고 그러셨다.

 

섬망을 한참 보이고나면 한숨 잠에 드셨다.

 

오전에도 구토를 조금 하셨다. 구토 후에는 역시 치아와 혀를 닦아드리는데 이제는 주로 협조적이지 않으시고 내 손을 깨무려고 하신다.

 

이도 닦여드리는 김에 아침부터 손수건에 샴푸를 살짝 묻혀 머리를 감겨드리고 세수와 팔 손 다리 발도 닦아드렸다.

 

사실 어제 저녁부터 아버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행여 복수가 차는 것은 아닌지 너무 걱정이 되었다. 배 뿐만 아니라 사지가 붓기 시작했다.

 

이 날 오후 호스피스 자문 간호사 선생님이 오셨다.

 

“배가 빵빵해지는건 임종기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아버님 피검사가 입원하실 때보다 안좋아지셨어요. 그럼에도 아버님께서 잘 견디시네요. 강하신 분 같아요. 이번주 주말이 고비일 것 같아요. 어쩌면 출국 날짜 고민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길병원 인공지능센터 간호사와 종양내과 레지던트가 말 안해주는 피검사 결과를 자문형 간호사가 말씀해주셨다. 어찌나 고맙던지..

 

 

저녁 시간에는 아빠가 구토를 30분 간격으로 하셨다. 양도 점점 많아졌다. 색깔도 짙은 갈색에서 검은색 토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내가 간호사들에게 경고했는데 아예 쌩으로 무시하더니 점점 횟수와 양이 느니까 본인들도 알겠다는 식으로 당직의한테 보고를 하겠다고 하면서 넘겼다.

 

 

구토로 인하여 이를 수시로 헹궈주다보니 아빠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드렸는데도 건조해서 각질이 일어나서 거슬려 보였고 마침 여행용 샘플 로션도 다 써서 올리브영가서 크림을 사와서 정성스럽게발라드렸다.

 

원래 평소에도 여자친구분과 함께 마스크 팩도 하고 그러셨다고 하시고 얼굴 비비크림도 바르시는 등 자기 관리를 하시는 분이셔서 나도 각별히 아버지 미용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10시가 넘자 토를 하는 횟수가 너무 심해졌다. 도저히 아빠의 치아 위생을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헹궈드리면 조금 있다 바로 토하고 그러셨다.

 

기도 흡인이 될까봐 침대를 살짝 앉힌 상태에서 재워드렸다. 그런데 내 마음도 몰라주시고 아버지가 올라오는 토를 삼키기 시작하셨다.

 

“아빠 제발 삼키지마.. 제발..!”

 


27일 토요일.

2시간 동안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새벽 12시에서 1시까지 잠깐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까 아버지의 숨소리가 이상했다.

 

‘고로롱 고로롱..’

 

그 사이에 내가 우려했던 기도 흡인이 되버린 것이다.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셔서 괴로워하시길래 간호사를 급히 호출을 했다.

코로 산소호흡기를 달았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의 숨소리는 거칠어져갔다.

 

“아빠 코로 숨쉬고 입으로 내쉬자

깊게 들이 마시고 내쉬는거야…”

 

그래도 아버지는 콜록콜록 거리시면서 숨소리는 물에 찬 폐소리로 고로롱 거리며 입으로 숨을 쉬셨다. 시간은 무척 빠르게 지나갔으며 아빠에게 계속 힘이 되는 말을 쉴새없이 정신없이 내뱉었던 것 같다.

 

“우리 아빠 잘 견디네.. 우리 아빠 잘한다.

숨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고…”

 

중간 중간 너무 숨쉬는걸 힘들어하셔서 담당 간호사가 석션을 하면서 몇번 더 토하게 해주고 아빠 구강내에 남아있는 분비물도 정리해주셨다.

 

어느덧 새벽 3시반이 되었다.

산소포화도는 90에서 80으로 떨어졌다.

 

“보호자분 혹시 면회할 가족 구성원들 몇명일지 추려주세요. 그리고 오늘 오전에 1인실로 옮기거나 급하면 간호 처치실에 모실게요.”

 

새벽 5시가 되자 산소포화도는 80에서 70대 가까이 떨어졌고 면회할 가족들을 긴급 호출하라고 했다. 아빠의 임종이 임박했고 급하게 간호사 처치실로 옮겨졌다.

 

이 때부터는 아빠의 모르핀 진통제를 빼버렸다.

급하게 올 사람들 통화해서 호출을 했고

아버지의 누이, 고모는 스피커 폰으로 목소리를 들려드렸다. 아빠가 숨을 힘들게 쉬면서 아파하시더니 고모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반응을 보이셨다.

 

“성보야 많이 아프지? 누나가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나는 옆으로 눕힌 아빠의 눈을 마주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아빠의 손을 잡고 내가 여태 하고 싶은 말들을 했다.

 

 

“내가 입원 당일에 아빠 그렇게 시도를 해버리는 바람에 화가 너무 나서 아빠 신경쓰지 못써줘서 미안해…

아빠가 그만큼 힘들었는데 딸인 내가 못알아봐줘서 너무 미안해… 너무 미안해서 자고 있는 아빠 옆에서 맨날 울었어… 후회될걸 알면서도 그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해…”

 

그 순간 아버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도 함께 울고 계셨다. 기침을 하고 폐에는 물이 차있는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길래

 

“아빠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그러니까 숨 쉬는 데만 집중하자.. 삼촌이랑 아주머니, 고모도 아빠 보러 올라오고 계시니까 조금만 견뎌보자 우리.

이 힘든 고통에 집중하지 말고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해보자. 아주머니랑 함께 6개월 동안 전국 일주 캠핑했던 추억들 떠올려보자. 아빠가 행복했던 순간들 떠올려보면서 숨 깊게 깊게 쉬어보자.”

 

산소포화도를 계속 체크하면서 숨을 쉬라고 격려하는 말과 하고 싶은 말을 쉴 새 없이 내뱉었다.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말하지 그랬어.

한번 연락할거 두번 세번 더 했을거 아니야..

왜 혼자 힘든걸 견디고 꾹꾹 참았어..

나한테 기대주지…

아빠한테 연락 더 자주할걸 후회된다… 미안해”

 

“아빠가 준 돈으로 우리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가게 됐어. 시부모님도 다니엘도 아빠한테 고맙데..”

 

“아빠 나는 걱정하지 말아. 우리 가족 대화도 없어서 이렇게 됐지만 나랑 다니엘 대화도 자주 나누고 그러니까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동생도 알아서 다 잘하고 주변 사람들한테 말도 잘하고 본인 앞가림 할 줄 아는 애야.. 아빠는 남은 우리들 걱정 안해도 돼..”

 

“아빠 유품은 내가 정리해서 영국으로 가져가서 내가 아이 낳고 그러면 외할아버지 유품 남겨줄거야.. 아빠 영원히 기억할거야..”

 

이 대목에서 잡고있던 아빠의 손이 두세번 꽉꽉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다음 생에 아빠가 내 딸하고 나는 아빠할까?

내가 아빠한테 받은 사랑 몇 배로 엄청 이뻐해줄게.. 아니면 아빠가 또 내 아빠해줘..

4주동안 아빠 간병하면서 함께 시간 보낼 수 있어서 나 너무 행복했고 이렇게 마지막 순간을 지켜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야.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

 

아빠 이마에 뽀뽀를 해드렸고 혀가 뒤로 말린 채로 숨도 고르지 못하시고 구토를 하는 와중에 아버지께서 힘을 내서 어눌한 발음으로 한 마디 하셨다.

 

“사랑해..”

 

그 순간 안그래도 눈물 범벅인데

울음이 미친듯이 엉엉 꺼이꺼이 터져나왔다.

 

 

“삼촌이 곧 오신데

진통제 맞으면 아빠 의사표현 이렇게 못할 수 있다는데 진통제 맞을래? … 아니면 기다릴래?”

 

아버지는 잡은 손으로 진통제를 맞지않고

삼촌을 기다리신다고 손을 꼭 한 번 잡으셨다.

 

“이야 우리 아빠 정말 대단하고 강인한 사람이다”

 

 

가장 가까이 살고계신 작은 아빠께서 7시쯤 도착했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비마약성 진통제를 넣어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이미 작은 아빠가 도착하셨을 때는 아버지의 근육의 긴장이 다 풀린 상태였어서 아무런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셨고 마지막 숨을 고르시며 속에 있는 것을 계속 게워내시고 계셨다.

 

한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작은 아빠는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

 

 

오전 9시 좀 안되서 여자친구분이 오셨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시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고르시며 숨소리에 맞춰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셨다.

 

“이 많은 것들이 있으니 우리 아빠 얼마나 답답했을까..? 시원하게 다 비워내~”

 

중간중간 계속 아빠에게 좋은 말들을 해드렸다.

 

좀 안되서 작은 엄마도 잠깐 들르셨고 청주에서 올라오고 계신 고모를 맞이하러 잠시 밖으로 나가셨다.

 

작은 엄마는 도착하시자마자 나에게 장갑을 주셨는데 정신없이 아빠의 토를 맨손으로 닦아드리고 있었다. 내 손톱 사이사이가 까만 구토로 인하여 까맣게 되버렸고 밤새 구토를 닦아드리느라 내 손가락은 쪼글쪼글 했다. 마스크를 벗고 아버지 얼굴에 가까이 대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가족이 아프면 그들의 분비물 등 모든 것들이 더럽지 않게 느껴지는구나.. 일 할 때는 몰랐던 점이다.

 

어느정도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신 것 같아서 여자친구분이랑 같이 간호사 불러서 옆으로 누은 아빠를 똑바로 눕히자고 했다.

 

“간호사가 그러는데 더 나올게 있을 수 있다고 기다리라고 하더라구요..”

 

내가 이 말을 하고나서 신기하게도 1분도 안되어 아버지가 숨소리에 맞춰 또다시 게워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피토를 시작한 순간부터 아버지의 몸은 완연한 임종기에 접어든 것이다.

보통 사람이 죽을 때 모든 구멍이 열려서 항문도 열려 대변을 보고 소변을 눈다고 하는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소변줄을 끼고 있고 장루를 하고 계시고 암으로 장기가 눌려서 대변이랄 것도 없는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정도 다 게워내셨는지 편안한 표정이셨다. 그리고 몇십분이 지났을까 맥박 수와 호흡 수가 서서히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아빠는 8월 27일 10시 11분에 신체적으로 사망하게 되셨다.

 

“아빠 이제 아프지 않지?

남은 우리들 걱정하고 미안해하지마.

우리 서로 미안해 하지말고 고마워만 하자.

아빠가 앞에서 자고있는데 아빠가 보고싶다.

벌써 아빠가 너무 보고싶네!”

 

여자친구분은 오른손 나는 왼손을 연신 쓰다듬었다. 여자친구분은

 

“으이그 이러려고 아팠던거야~?

마지막 가는 길에 여자 두명이 양쪽에서 손을 다 잡아주고..”

 

아빠 들으시라고 유쾌하면서도 행복한 말들을 계속 나누었다.

 

고모는 10시 40분 쯤에 도착하셨고 구안와사로 감겨지지 않은 아버지의 한쪽 눈과 벌어진 입을 닫아드리며 고생했다며 수고했다며 가서 아픔없는 곳에서 편히 쉬라고 하셨다.

 

상주가 될 나는 장례식장 준비를 바로 해야해서 사망선고를 지켜보지는 못했다.

사망선고는 8월 27일 11시 58분.

 

장례식장 평수를 고르고 병동으로 돌아와서 보니

사망선고 후 정리를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고 고모와 작은 엄마 그리고 여자친구분이 간호사 처치실에서 나오고 계셨다.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계신 아버지를 보며

마지막 인사를 밝게 해드렸다.

 

 

“아빠! 안녕!”

 


 

 

 
아빠가 딸에게 보내는 글

 

6월 11일에 아빠가 써준 글.

 

장례식 진행하면서 고모, 삼촌, 여자친구, 그리고 지인분들이 아빠가 이 맘 때 부터 아프기 시작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픈신데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결혼식 준비하는 딸이 걱정할까봐 본인 아프신건 절대 알리지 않으셨다.

 

결혼식 피로연 때 스피치로 한국에 계신 아빠 엄마 편지 읽어드린다고

글 써달라고 요청했을 때 보내주신 아빠의 마지막 편지.

반응형

댓글